유식이란 무엇인가(5)

 제8아뢰야식은 의식, 두뇌, DNA와 어떻게 다른가?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우리의 지난 경험의 내용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모두 축적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상식에 비추어볼 때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유식이 놀라운 것은 그러한 정보의 보관소, 종자가 함장된 곳을 우리 각자의 심층 마음, 아뢰야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식은 왜 종자 보관소를 심층 마음인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것일까? 유식이 종자의 보관소라고 설명하는 아뢰야식은 우리가 흔히 정보 보관소로 떠올리는 1) 의식이나 무의식, 2) 두뇌 또는 3) DNA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의식, 두뇌, DNA 

1) 의식 또는 무의식 : 경험의 축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우선 과거를 기억하는 의식을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 책의 내용이 의식에 남아 있고, 지난 경험들도 의식 안에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기억하거나 감지하는 범위는 우리의 전체 경험에 비해 극히 제한적이다. 우리 감각이 경험하거나 의지가 욕망하는 것들은 나중의 기억은 차치하고 그 순간에 의식조차 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므로 모든 경험 내용이 의식 안에 남아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의식보다 좀 더 넓은 범위의 무의식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무의식이 개인적 의식의 침전물이라고 간주될 경우, 그런 무의식은 의식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의식이나 무의식은 물리적 세계 자체와 그 속에 등장하는 유근신으로서의 개체적 나를 객관 실재로 이미 전제한 후 그 위에서 일어나는 심리 현상들이다. 그러므로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그것이 각자의 몸(근)을 형성하고 각자가 경험하는 세계(경)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들을 일체 종자의 저장소라고 말할 수는 없다. 

2) 두뇌 : 그다음 사람들이 경험된 내용인 정보가 함장되는 곳으로 쉽게 떠올리는 것은 두뇌. 인간의 두뇌는 각각의 다섯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감각 자료)들을 모두 한데 모아서 처리하는 중앙 정보처리 시스템의 역할을 한다. 탄생 이후 감각과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의 표층식의 활동에 의해 얻어진 모든 정보 내지 종자가 수억의 두뇌 신경의 시냅스 연결을 통해 일정한 두뇌 신경망, 특정한 인지 체계를 형성하니, 모든 정보, 종자가 두뇌 신경망에 축적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는 그 신경망에 상응해서 그 신경망을 따라서만 대상 세계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유근신과 기세간을 형성하는 일체 정보 내지 업력이 저장되는 곳은 바로 두뇌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두뇌는 대상 세계에 속하는 물리적 색법으로 몸, 유근신의 일부다. 몸이 죽으면 따라서 사라지는 것이므로, 두뇌는 생사를 넘어 업력 내지 종자를 보존하고 있다가 그 보를 낳는 그런 종자의 저장소가 될 수 없다. 유식이 말하는 종자의 저장소는 중생의 몸을 형성하는 업력, 기운, 에너지를 함장하는 것인데 반해, 두뇌 신경망은 오히려 그렇게 함장된 종자, 에너지가 구체화되어 드러난 결과물일 뿐이다. 종자가 현행화해 드러난 결과물을 종자의 보관소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뢰야식은 개별적 신체가 죽을 때 남겨지는 업력, 에너지로서 중유(中有)를 이루다가 다시 다른 몸을 형성하는 식이다. 반면 두뇌 신경망은 그 아뢰야식 내 종자가 구체적 현실로 드러난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두뇌를 업력, 종자, 정보의 저장소라고 할 수 없다. 

3) DNA : 경험의 정보나 종자가 개별적 생명체의 한계를 넘어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사람들이 정보의 저장소로 떠올리는 것은 DNA일 것이다. 각 생명체의 DNA 안에 인류의 역사 내지 전 우주의 역사가 그 기록으로, 유전 정보로 남겨져 있으며, 그 유전 정보를 따라 각 개체의 몸, 유근신이 만들어지고 또 그 각자의 몸(근)에 상응해서 대상 세계가 나타나니, 결국 모든 정보를 함장하고 있는 종자의 저장소를 바로 DNA라고 여기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자식에게로 전달되는 유전 정보의 기본 단위가 유전자(gene)이며, DNA는 바로 그런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정보의 저장소다. 그런데 DNA는 A(아데닌), G(구아닌), C(사이토신), T(타이신)의 염기가 나선 모양으로 배열된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 고분자 물질이다. DNA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세포핵 내 염색체 안에 들어 있으며, 부와 모의 생식세포의 분열된 염색체의 배합을 통해 둘의 유전 정보가 자식에게로 전달된다. 

그런데 유전 정보의 저장소라고 할 수 있는 DNA는 염기로 이루어진 고분자 물질로서 결국은 물리적 신체에 속하는 것이다. 목숨이 다해 죽게 되면 몸을 이루는 세포가 부패하고 그러면 그 안에 들어 있던 염기서열의 DNA도 함께 멸하고 유전 정보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 만약 어떤 정보가 물리적인 USB 안에만 저장되어 있다면, 그 USB가 파괴될 경우 정보도 함께 사라지게 되는 것과 같다. 죽기 전에 자식을 낳으면 (다른 USB로 다운로드받으면) 유전 정보가 남겠지만, 자식 없이 죽는다면 유전 정보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불교가 논하는 업보의 관계는 자식의 유무와 상관없이 성립하며, 개체적 몸의 소멸인 죽음을 넘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뇌와 마찬가지로 DNA도 불교가 말하는 업력의 담지자, 즉 생사를 넘어 종자(정보)를 보존하다가 결국은 그 보를 낳을 그런 종자의 저장소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보를 낳을 종자는 아뢰야식에 함장되어 있고, 그 아뢰야식이 이 세상의 몸을 만들 때 중연으로 취하는 것이 바로 자신 안의 종자의 기운과 가장 기운이 유사한 부와 모의 종자이기에, 그 부모와 자식 간에 DNA의 닮은꼴이 성립하는 것이라고 본다. 


아뢰야식의 자기 자각성

  의식도 아니고 두뇌도 아니고 DNA도 아닌, 정보 저장소로서의 아뢰야식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정보의 드러남이란 점에서는 의식과 유사해 보이고, 정보의 축적이란 의미에서는 두뇌 신경망과도 유사해 보이며, 무시이래의 경험의 축적이란 의미에서는 유전자와도 유사해 보인다. 그렇지만 두뇌나 유전자는 가시적인 물리적 존재인 색법(色法)으로서 감각 대상인 경(境)에 속하고, 의식은 그런 대상을 반연하는 제한된 식(識)이다. 정보와 연관해 논하자면 아뢰야식은 차라리 허공중에 무한한 정보를 담고 있는 클라우드에 비교될 수 있다. 의식이나 두뇌나 유전자는 클라우드로부터 호출해온 자료, 이미 현행화해 드러난 현상에 해당한다. 반면 아뢰야식은 클라우드처럼 온갖 정보가 그 안에 머물러 있는 허공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아뢰야식이 허공과 다른 점은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자각, 본래적 각성, 본각(本覺)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뢰야식은 일체 정보를 담은 전체의 일(一)이면서 무정(無情)의 허공과 달리 각성이 있는 심(心)이다. 곧 일심(一心)이다. 이러한 아뢰야식의 자기 자각을 원효는 ‘마음이 신묘하게 자신을 안다’는 뜻에서 ‘성자신해(性自神解)’라고 부르고, 지눌은 ‘허공처럼 텅 빈 고요한 공적의 마음이 신령하게 스스로를 안다’는 뜻에서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부른다. 이 각성의 힘으로 우리는 우리 마음 안의 일체 정보를 예감하면서 혹 호출하기도 하고 혹 찾아 헤매기도 하고 혹 놓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자의 저장소를 ‘아뢰야식’이라고 칭하는 핵심은 저장 내지 함장이라는 의미의 ‘아뢰야’에 있지 않고, 각성 내지 깨어 있음이라는 의미의 ‘식(識)’에 있다. 그 안에 저장되는 종자나 정보가 아뢰야식을 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 자체가 식으로 깨어 있음으로써 비로소 그 안에 종자를 수용하고 유지하고 활성화해 종자를 살아 있는 종자로 만드는 것이다. 결국 아뢰야식이 종자의 저장소로 작동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아뢰야식의 자각성인 것이다. 아뢰야식은 그 안에 무수한 생으로부터의 무한한 양의 종자를 함장한 식이기에, 각성은 있되 제한된 정보만을 갖는 개체적 의식이나 무의식과 구분되고, 또 심층 마음으로 깨어 있는 자기 자각성의 식이기에 무수한 정보는 갖고 있되 각성이 없는 물질인 두뇌나 DNA와 구분된다.  

  아뢰야식의 깨어 있음 내지 각성의 의미는 우리가 ‘적적’과 ‘성성’을 함께 유지하는 수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적적(寂寂)을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이 마음의 대상으로 향하지 않고 마음 자체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대상을 좇아가는 반연심 내지 산란심인 표층 의식이기를 멈추고 심층으로 향하게 된다. 성성(惺惺)을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에서 좇아갈 대상이 사라질 때 함께 마음까지도 혼미해져서 덩달아 잠들지 않고 성성하게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심층 마음의 본래적 깨어 있음, 본래적 각성을 자각하게 된다. 말하자면 마음에서 대상이 없어지면 마음은 대상 의식인 제6의식보다 깊은 심층 마음으로 나아가고, 그 상태에서도 깨어 있으면 그때 비로소 심층 마음의 자기 자각성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층 마음의 자기 자각성을 『기신론』은 마음의 ‘본래적 각성’이란 의미에서 ‘본각(本覺)’이라고 했다. 원효의 성자신해, 지눌의 공적영지는 바로 이러한 본각, 심층 마음의 자기 자각성을 의미한다. 심층 마음의 본각을 거울로 비유하자면, 이는 거울의 작용이 그 앞에 있는 대상을 비추는 것(수연응용)에 그치지 않고, 그 너머에서 항상 스스로를 비추고 있는 것(자성본용)과 같다. 우리의 마음 활동은 표층에서 대상을 좇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산란심(생멸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심층에서 항상 깨어 있는 마음인 것이다. 아뢰야식은 이런 공적영지의 마음, 본각의 마음이다. 

  마음을 이와 같이 제6의식 너머의 심층 마음, 공적영지의 마음, 본래적 각성, 본각의 마음으로 이해하면, 마음은 단지 정보처리 시스템으로서의 컴퓨터나 로봇 등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마음이 마음인 까닭은 단지 축적된 정보들의 집합, 축적된 정보가 처리되는 시스템, 또는 그 시스템에 따라 정보가 처리되는 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주어진 정보를 알아차리는 깨어 있음과 나아가 그러한 자신의 깨어 있음을 스스로 자각해 아는 자기 자각성이 있는데 반해, 입력된 정보나 정보들의 처리 시스템은 그런 자각성 없이 작동하는 기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유식은 일체 현상 세계를 만드는 것은 단지 추상적 정보나 죽은 물질이 아니라 바로 성성하게 깨어 있는 마음, 스스로를 신령스럽게 자각해 아는 마음, 각자의 심층 마음이라고 강조한다. 이 깨어 있는 심층 마음이 바로 각성의 마음, 본각의 마음, 부처의 마음이다. 대승 여래장 사상은 이를 불성, 여래장, 일심이라고 부르고, 선불교는 이를 인간의 진심, 본심, 본래면목이라고 부른다.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서양 철학(칸트)을,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현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불교철학과 현대 윤리의 만남』, 『대승기신론 강해』, 『심층마음의 연구』,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나는가』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