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ㅣ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정계섭 

 전 덕성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문법으로 알려진 함무라비(Hammurabi, 재위 B.C. 1792~B.C. 1750) 법전에 쓰여 있는 법칙이다.

  흔히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이라고 불리는데 탈리오비슷한, 유사한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팔을 부러뜨린 자는 팔을 부러뜨리고, 눈을 멀게 한 자는 똑같이 눈을 멀게 한다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도 이 원칙이 세 번 씩이나 천명되고 있는데, 그중 레위기(2419~20)를 보면,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라고 말하고 있다.

  복수를 정당화하는 이 법칙은 얼핏 보면 무척 잔인하고 야만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법칙은 억지(抑止) 효과가 없지 않다. 자신의 팔이 부러질 각오를 하면서까지 남의 팔을 부러뜨릴 마음은 쉽사리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사람은 이유 없이 해코지를 당하면 응당 앙갚음을 떠올린다. 한 아이가 동네의 힘센 아이에게 얻어맞고 들어오면 형이 나서서 그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준다. 그러면 최초 가해자의 부모가 나서고, 결국 사소한 아이들의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문제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되면 당한 만큼 정확하게 비례해서 되갚아준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데에 있다. 인간사의 모든 비극이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분노는 미움보다 무섭다. 설령 누군가를 미워하더라도 그는 그래도 같이 살아야 하는 동반자로 여겨지지만, 누군가에게 분노할 때에는 상대를 완전히 없애고 소멸시키려고 한다. 사람들의 상투어 중 하나가 죽여버리겠다!”가 아니던가. 이것이 따귀 한 대가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메카니즘이다.


함무라비 법전


  눈 하나를 멀게 하면 피해자는 가해자의 두 눈을 멀게 하려들 것이며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죽여버리고 심지어 그 가족마저도 죽이려 들 것이다. 이렇듯 악을 더 큰 악으로 갚으려 드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그래서 작은 갈등이 순식간에 수습할 수 없는 분쟁으로 에스컬레이션되어 종국에는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보복이 집단의 보복으로 확산된 것이 전쟁이다.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이라고도 불리는 눈에는 눈원칙의 골자는 지나치기 쉬운 인간의 복수심을 억제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당한 만큼만 돌려주라는 것이다. 누가 당신의 팔을 부러뜨렸는가? 그렇다면 그의 팔만 부러뜨려라! 더 이상 나가 다리까지 부러뜨려서는 안 된다는 보복의 최대값을 정한 것이다. 그것도 피해자가 직접 나서서 하면 안 되고 권위를 부여받은 재판관이 해야 한다. 개인적 감정에 따라 사형(私刑)에 의존하게 되면 틀림없이 죗값 이상의 복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해복수법은 가해자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다.

  그런데 법칙대로 가해자의 이를 뽑았다고 해서 피해자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가?

  복수의 감정만을 충족시켰을 뿐 실질적으로 아무런 이득도 없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래서 나온 것이 복구(restauration)’의 개념이다. 최초 피해를 당한 (1)’에 대한 (2)’ 대신 치과에 가서 보철(補綴)을 하자는 것이다. 비용은 물론 가해자가 지불해야 할 것이다.

  이 대안은 관점이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옮겨 간 것으로 복수보다는 피해 복구에 중점을 둔다. ‘징벌적 정의(punitive justice)’에서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로 가는 건설적인 방향이다.

  아무튼 탈리오의 법칙은 그런대로 형평은 유지하지만 평화는 만들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황금률(Golden rule)이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마태복음 538~39)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복음)

  여기에서 악한 자는 당신에게 피해를 끼친 자를 의미한다. 예수의 이 말씀은 바리새인이나 율법 학자들의 해석과는 180도 다르다. 사도 바울도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로마서 1221)라고 명령한다.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악에게 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러분은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믿기지는 않지만 가능하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것은 바로 선으로 악을 이겼기 때문이다.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당했다. 원형 경기장에서 굶주린 사자가 다가오는데도 찬송가를 부르거나 기도하면서 어떤 적의도 보이지 않고 순한 양처럼 죽어나갔다.

  로마의 모든 시민들이 이 끔찍한 장면을 보았다. 그중에서도 로마 귀족 부인들은 억누를 수 없는 감동과 더불어 큰 의문을 품었다. 도대체 그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울부짖거나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고 조용히 죽어갈 수 있게 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들이 믿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그의 가르침을 전해 들었다. 복수심 자체를 사라지게 해 강물 같은 평화를 회복되도록 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저 놀라운 가르침 말이다. 그래서 로마의 귀족 부인들이 제일 처음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부인들의 신앙이 남편에게 전파되는 것은 시간문제고 마침내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된 것이다. 악을 선으로 이긴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이 사랑이라면, 불교에는 용서자비가 있다.

  『법구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려 하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을 놓아버려야 사라지나니 이것은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다.”

  실제로 부처님은 술취한 코끼리를 풀어놓는 등 부처님을 해치려고 온갖 극악무도한 짓을 한 제바달다(Tevadatta)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가 미래에 부처가 될 것임을 수기(授記: 다음 세상에 부처가 된다는 것을 미리 인가해주는 것)하셨다.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미움이나 나쁜 감정을 키워나간다면, 나 자신의 마음의 평화만 깨질 뿐이다. 하지만 그를 용서한다면 내 마음도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용서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중국 당국에 붙잡혀 18년 동안 갖은 고문을 당하며 옥고를 치뤘던 티베트 승려 로폰라는 두려운 적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한 가지 두려운 것이 있었다. 나 자신이 중국인들을 미워하게 될까봐, 그들에 대한 자비심을 잃게 될까봐 그것이 두려웠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라고 증언한다. 이 승려는 그 괴로운 사건들이 마음의 평화를 깰 만큼 가치가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의 군중(群衆)이다. 착할 때에는 한없이 착하다가도, 악할 때는 바늘구멍만큼도 못하게 속 좁은 게 인간이다.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이 천사와 악마의 결투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떤 중생은 이런저런 이유로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 때문에 상처와 고통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며 나날을 살아간다.

  이렇게 되면 마음의 평화가 깨져 진정 중요한 일들을 소홀히 하게 된다. 원한을 품는 것은 몸에 독을 품고 있는 것과 같아서 남을 해치기 전에 나 자신을 먼저 해친다. 이것은 정신-신체 의학(psychosomatic medecine)이 밝혀낸 사실이다. 암의 주범이 스트레스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서하기 위해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가지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더 나아가 복수를 해도 시원할까 말까 한데 천벌을 받아 마땅한 원수를 사랑하라고? 언감생심, 그것은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고 해를 비춰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일을 하라는 지상명령이 떨어진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태복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고무적인 말씀을 만나게 된다.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다를 것이 없다)

  시궁창에 들어가 있어도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다.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에 물든 나 같은 중생도 무명의 덮개만 걷어내면 찬란한 태양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완전함 또는 해탈(解脫)의 열쇠다. 이번 생에 못 이루면 다음 생에, 다음 생에도 못 이루면 그다음 생에... 다만 윤회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간은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단서가 여기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어내는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 수행을 열심히 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지혜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으려면 우리의 전 존재를 내던져야 할 결단이 필요하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로라하는 석학들도 겸손하게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인생이란 불완전에서 완전을 지향하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도정이다.

 

 

정계섭

프랑스 파리 쥐시외(Paris -7) 대학에서 일반언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덕성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마르세유 대학 IML(루미니 수학연구소) 초빙교수, 소르본 대학 응용인문학연구소 초빙교수, 파리-에스트-크레테유(Paris -12) 대학 철학연구소 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말로 배운 지식은 왜 산지식이 못 되는가등이 있다.